봉녕지 2014년 23호 - page 32

1시간 넘게 달려서 도착한 봉암사는 흰 바위가
우뚝 솟아 힘찬 기운을 느끼게 하는 희양산 중
턱의 너른 대지에 서 있다. 그 옛날 봉암사를 개
창한 지증 대사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
로 내달리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라고 표현
했을 만큼 신라 말부터 지금까지 역동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결사의 바람을
몰고 온 중심부가 봉암사가 된 것도 우연을 가
장한 필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광복 직후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는 혼란을
겪었고, 불교는 일본의 영향으로 생긴 대처승과
비구승의 갈등으로 상처가 깊었다. 이 시대에 성
철 스님과 청담 스님은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
아가자는 결사운동을 봉암사에서 꽃 피웠다.
율사 자운 스님은 최초로 육법을 설하면서 예
비 비구니인 묘엄 스님에게 식차마나니계를 주
어 계율로써 청정한 수행도량의 기틀을 마련했
고, 그 뒤에는 부처님 법대로 살고자 했던 여러
큰스님들이 실천 수행을 이루었으니 도량에 선
기가 가득했을 것이다.
당시 18세였던 묘엄 스님도 이 선풍의 기운을
받아 근처 백련암에서 몇몇 도반들과 글을 배
우고, 외우고, 강 받치고 틈틈이 참선했다. 그
때 받은 ‘마음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요, 부처
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란 화두를 들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며 가장 중답게 살 때가 봉
암사 결사 때라 말씀하곤 했다.
“뜰 밖에 앉아서 좌선으로 밤을 새우고 비가 오면
부엌 나뭇단 위에서 화두를 들고 드러누워 잠을 자
본 적이 없던 그때는 밤 한 시까지 봉암사에서 법
문을 듣고 백련사로 올라가다 보면 호랑이하고 마
주쳐 등골이 오싹해 다시 내려오면 큰스님네들은
우릴 보내놓고도 걱정스러워 밖을 서성이다 담력을
키워 주느라 다시 혼내 올려보내고…. 누더기를 입
어도 정신은 살아 있는 그런 시절을 살며 왔어. 중
국에 말산 요연 비구니가 육환장에 삿갓 쓰고 장삼
입고 그래 댕겼다고, 우리 비구니도 가사, 장삼 입
고 삿갓을 쓰고 그때부터 그랬어.”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결사의 정신에 이어
스님은 상주로 점촌으로 함창으로 탁발을 나
간다. 걷다가 다리 밑에서 거지를 만나면 공양
물을 나눠 주고, 옷을 벗어 주고 사립문 안에서
짖어대는 강아지들과 함께 반야심경을 독송하
며 그렇게 걷고 또 걷는 스님의 모습 뒤에는 혹
시나 딸이 발심이 안 되어 하기 싫은데 당신 때
문에 억지로 하는 건 아닌지, 후회는 없는지, 철
저하게 중 노릇을 하는 신심이 있는지 늘 묻곤
하는 아버지 스님의 따스함이 있었다.
“묘엄 수좌는 아버지한테 무엇을 받았는 가?”
“중 노릇을 받았습니다.”
“중 노릇이 어떤 거냐?”
“어떤 거라고 내 마음으로 그려낼 수는 없지만 지
금 내가 참불법을 만나 중 노릇하는 것이 다행스러
운데 그것이 아버지 스님한테 받은 게 아니겠습니
까? 유산이라고 하면 유산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
다.”
“허허허!”
월산 조실스님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꽝꽝 메
아리친다.
때때로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노력의 결실이 지
금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잊곤 한다. 꽃보
다 아름답게 피어난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그 길 끝에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동기가 되고
그것이 용기가 되어 수행의 힘이 된다는 이정표
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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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봉암사 산길을 걷는 묘엄 스님의 뒷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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