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지 2014년 23호 - page 31

님의 기억에서 모락모락 되살아나는 묘엄 스님
이야기로 차 맛이 다디달다.
“묘엄 시님이 채공을 살 때였는데, 해제를 하
고 나서 몇몇 스님들이 산에서 송이버섯 두 개
를 따왔어. 내일 아침에 송잇국을 끓인다고 대
중에 알리자 좋아들 했지. 다음날 대중스님들
은 ‘송이 향이 좋다’, ‘맛있다’, ‘잘 먹었다’
카고 신났어, 전 대중이…. 그런데 엄 시님이 수
각에 가 보니까 글쎄 깨끗이 씻어 놓은 송이 두
개가 그대로 선반에 있는 거야. 이유인즉 어린
나이에 새벽잠은 쏟아지고 제정신이 아니지, 눈
비비면서 된장 풀고 그러다가 송이 넣는 걸 까
먹은 거지. 그걸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대. 그
러니까 그날 먹은 국은 송잇국이 아니라 일체유
심조국이라. 안 그래?”
선원장스님의 기억이 이어진다.
“큰스님들이 비구니강사를 만들끼라고 엄 시
님과 몇몇 스님들을 모아 암자에서 공부를 가
르쳤는데, 그 마당 끄트머리에 앉으면 아래에
있는 무당집 뒷마당이 보인다고. 전을 부치고
하는 게 다 보여. 엄 시님이 책 읽다가 너무 배
가 고프면 마당 끝에 쪼그려 앉아가 전 부치는
걸 중계를 했대. 뒤집어야 한다, 요쪽으로 옮겨
야 한다, 또 한 국자 떠놓아야 한다. 그러면서
눈으로 실컷 자시고 공부하러 가곤 했대. 그렇
게 살았다고. 그래도 중 생활이 좋았어. 저기 선
방 공양간에 그때 엄 시님이 열너덧 살 때부터
쓰던 가마솥 있거든. 가서 사진도 찍고, 부전으
로 살며 모시던 선방 부처님도 계시니까 뵙고
그래.”
찻 자리에서 물러나와 가만가만 잔디 사이에
놓인 돌을 밟아가며 도량을 서성이다가 사불
전에 올랐다. 법당 큰 유리문을 통해 사불암이
보인다. 비바람으로 산줄기가 아래로 흐르다
다시 위로 솟구쳐 올라 대승사와 윤필암을 품
고 꿈틀댄다. 스님은 저 산 사이를 오가며 큰
스님들께 들은 좋은 말씀을 소나무에게도 전
하고, 폴짝 계곡물을 건너면서 바위에게도, 다
람쥐에게도 전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은 많이 아는 것보다 인간다워야 중
노릇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과 조사스
님들의 이야기에 빗대어 들려주시고, 청담 스님
은 늘 하심하여 억울한 일을 겪어도 변명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을 것이다. 행여나 스님은 어린
마음에 조금이라도 그릇된 생각을 가질까 싶어
대승사 오가는 고갯길을 살얼음판 딛듯 다녔으
리라. 그 습관이 평생 자신을 단속하는 수행의
디딤돌이 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동산 스님
(성철 스님의 은사스님
)이 ‘묘엄’보
다는 ‘묘음’이라고 하면 더 유명해진다며 법명
을 바꾸라는 것을, 스님은 성철 스님이 준 건
데 큰스님이 아니라 큰스님 할아버지가 와도 절
대 안 바꾼다며 마음속 깊이 아껴 주신 그분들
의 사상을 바위에 새기듯 마음에 새기며 아이에
서 심지가 곧은 비구니로 자라난다.
“윤필암, 내 살던 곳을 그림으로 그리라 카면 그릴
수 있어. 어디에 무슨 돌이 있는지 개수까지 알았으
니까. 밤중에도 돌 하나하나 요리조리 디디면 딱딱
밟혀. 돌아댕기면서 염불도 하고 소지하기도 하고
이랬기 때문에 그 도량에 돌 하나 박힌 것까지 환
해. 장독대 있던 자리, 산신각 앞에 전부 다….”
그 어릴 적 ‘나반존자’라는 정근을 잊어 “독
성~독성~” 하며 어설프게 목탁을 치던 천진한
스님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지만, 내 마음
의 눈에 그려놓으며 산길을 내달려 불교사에 길
이 남을 자정혁신운동이 일어났던 봉암사로 향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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