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지 2014년 23호 - page 29

그 옛날 인순이
(큰스님 속명)
가 방 거사를 따라 김천에서 기차를 타고 점촌에 내려 대승
사까지 60~70리 길을, 가지런히 심은 논의 모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기 좋다며 힘
든 줄 모르고 걸었던 그 길을, 나는 차를 타고 달린다. 드문드문 농가가 보이는 길을
한참을 따라가니 이내 울창한 산길이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산허리까지 낮게 드리운
구름과 계곡 사이사이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마치 세속의 이쪽과 불심의 저쪽을 연결해
주는 고리처럼 보인다.
묘엄 큰스님 출가 당시의 윤필암
문경 대승선원(옛 쌍련선원)
대승사 쌍련선원
(현 대승선원)
마당에서 인순이가 성
철 스님과 청담 스님께 잠시 머물다 갈 요량으
로 인사를 드리고 도량을 둘러보았듯, 나도 천천
히 발걸음을 법당에서 오백나한전으로, 명부전에서
삼성각으로 마음 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옮기
며 시간과 공간을 잠시 잊고 스님의 발자취를 따
라가본다.
“왕과 거지가 죽으면 뭐가 다르노?”
“장례식의 호화롭고 초라한 차이는 있으나 죽은 사
람은 다 똑같습니다.”
“옳지. 옳지.”
성철 스님은 인순이의 대답이 기특해 잠시 틈이라
도 나면 선방에 인순이를 앉혀 놓고 부처님과 역
사, 문학, 철학 등등의 얘기를 부지런히 들려주었
다. 마치 주디의 ‘키다리아저씨’처럼 어린 인순이는
인정 많고 박학다식한 성철 스님의 모습이 신묘하
고 환희로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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