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지 2014년 23호 - page 44

내가 빅토리아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9월이었다. 남자친구와 자전거 하이킹
을 하면서 우리 절
(한마음선원 제주지원)
옆을 지나가다가 수많은 영탑이 층층이 자
리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호기심이 나서 도량에 발길을 들였다고 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종무소로 나갔던 내가 그때 마침 빅토리아와 마주쳤고,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기에 안내를 해주었다. 그저 지나다 들렸나 보다 했는
데 대화를 나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매주 한 번씩 저
녁예불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은 들었어도 사실 꼭 다시 올 거라고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런
데 웬걸, 빅토리아는 다시 절을 찾아왔고 게다가 혼자가 아니라 진저라는 친
구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또 다른 친구, 그 다음 주에도 또
다른 친구를 데려왔다. 이렇게 해서 젊은 미국인 원어민 교사들과의 인연이 시
작되었다.
제주도에 온 지 3년째인 나는 그동안 이곳에서 어린이법회와 학생회 그리고
청년회 법회를 담당해 왔다.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법회 담당 선생님들과 같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금 시대에 맞게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려고 법회 프로
그램을 고민한다. 많은 자료를 참고하면서 한국인 불자들을 위한 법회를 준
비하는 데에도 애쓰고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데, 한국불교를 배우려는 외국
인을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영어
도 짧고…. 이런저런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나는 이 인연이 무척 소중하게 여
겨졌고 무조건 열심히 해보고 싶었다.
일단 영어로 된 저녁예불 의식을 찾아서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로마자로 표
기된 것과 영어 번역을 함께. 그런데 어느 날 한글로 된 것을 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한글을 읽을 줄 알았다. 나는 그저 나를 따
라 오분향과 칠정례, 그리고 반야심경을 한글로 독송하는 그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저녁예불은 따라서 하게끔 만들었는데 이제 저녁예불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저녁예불은 짧고 그것만 하고 보내기엔 너무 아쉬웠다. 그래
서 일단 사찰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들, 즉 사찰 예절, 연꽃 만들기, 단주 만
들기 등을 해보았다. 물론 이것들의 의미를 미리 영어로 설명할 준비를 해두
었다.
솔직히 우리로서는 식상해서 이제는 법회 중에 잘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한데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새롭고 즐거운 체험임을 보고는 나도 덩달아 그 식상한
마음이 녹아 버렸고 새롭게 와 닿았다. 그러나 이들을 만난 지 여러 달, 이런
불교문화 체험만이 아니라 불교의 사상과 정신을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
하게 들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도 자신의 삶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생활
에서 불교를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살면서 혹 어려움을 만났을 때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되도록….
사진 제공 - 혜홍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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