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지 2014년 23호 - page 58

도감스님께 훔친 레시피, 늙은호박전
혜욱 . 2학년
내 앞에 갑작스레 닥친 일에 대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죠. 화를 내거나 닥친 그 일을 묵묵히 감
당하거나…. 닥친 일을 다가온 인연 따라 무감히 해내는 사람은 흔히 말하는 능력자라 할 수 있습니
다. 보통은 당황해서 화를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해내기 어렵다고 한순간 생각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상
대적으로 부담감이 가면 갑작스레 벌어지는 일에 마음이 올라오기 마련입니다. 발우를 펴면서, 울력을
하면서, 혹은 소임지 청소를 하면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만 특히나 후원 소임은 소임의
특성상 지금의 내 ‘꼴’을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후원 소임 둘째 날, 일머리 없는 내가 하루를 보내고 나서야 뭘 해야 하는지 헤아려지는데, 갑작스레
계획에도 없던 누런 호박이 등장했습니다. 수레 가득 실려온 호박은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죠. 늙은호
박전 메뉴가 새로 생긴 것입니다. 알뜰한 누군가의 손이 쉽게 버릴 수 없었던 늙은 호박을 저녁 찬의 하
나로 정한 것입니다.
호박이나 오렌지는 어느 한 쪽이 썩었을 때 그냥 통째로 버린다고 들었는데…. 그런 생각을 담아 둔
채 호박을 잘라 껍질을 벗겨 내는 손이 떨렸습니다. 김치를 썰어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머릿속을 지나갔
습니다. 문득,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성분이 무엇인지 헤아려졌습니다. ‘화’라는 이름. ‘이것을 스님들께
공양한다는 거야?’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화! 였죠.
칼질하는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천천히 헤아려보니 내가 김치를 썰어 낼 시간에 쫓길까봐 미리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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