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지 2014년 23호 - page 59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껍질을 벗긴 누런 호박을 넘기고 김치를 썰며 준비하는 동안, 누군가 짠
반찬을 만들었고 배식대가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내 손을 걱정하는 동안 누군가의 손이 내 손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양 목탁을 칠 시간이 가까웠는데 이 전을 부쳐 낼 수 있을까.
그때 도감스님께 지원을 청하는 원주스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담담하게 쌀가루랑 밀가루를 청하는 도
감스님의 목소리. 이어 들리는 도감스님의 도마질 소리에 여기저기에서 “와!” 하는 탄성이 들렸습니다.
늙은호박전이 부쳐지는 소리와 냄새. 공양게송이 끝나고 배식대에 놓인 누런 호박전은 노랗게 잘 익은
보름달처럼 참 맛있어 보였습니다. 덥석 두 장을 담아다가 맛나게 먹었습니다. 아직도 올라오는 화를
바라봐야 하는 내가 눈물 나고 부끄러웠습니다. 도감스님이 그냥, 무감히 부쳐 낸 늙은호박전을 꾹꾹
삼키면서 그 요리의 힘도 내가 받아 삼키길 바랐습니다.
요리를 하지 못하는 내가 감히 요리의 힘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아직 요리를 모르고 다만 내
앞에 닥친 모든 일에 이런저런 이유, 혹은 ‘왜?’라는 것을 없애다가 보면 내 안에서 저절로 자라는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공양간에서, 음식을 통해서 알게 될 수도 있구나, 할 뿐입니다.
끝으로 늙은호박전을 맛나게 부치는 법을 소개해 본다면, 재료는 쌀가루와 밀가루, 약간의 소금뿐이
나 늙은 호박처럼 편안한, 넉넉한 마음자리는 꼭 빼놓지 말고 준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껍질 깐 늙은
호박을 채 썰어 약간의 소금으로 간해 둡니다. 그러고는 내가 한다는 마음도 풀어놓고 둥글게, 맛나게
부쳐 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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