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지 2014년 23호 - pag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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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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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보전 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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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남의 떡이 커 보인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멋져 보이는데 내가 하는 일은 시간 낭비인 것
같다.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맡겨진 일만
해야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빛나는
일도 아니고 해봤자 드러나지도 않는 잡다한
일을 할 때 젖어들기 쉬운 회의다. 내가 기껏 이
런 허드렛일이나 하려고 그 고생을 하며 여기
까지 왔던가, 관두고 싶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확신이 없을 때 혹은 자신의 스승에게 신뢰가
없을 때 흔히 겪는 슬럼프다.
사찰 벽화에는 수많은 불보살님들이 현현한
다. 중심 전각에서 빛을 발하는 화려한 부처님
이 있는가 하면 후미진 자리에서 눈길 한번 받
지 못한 채 감춰진 부처님도 있다. 그분들은
자리에 대한 고민이 없을까? 하는 일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을까? 부처님이고 보살님이니까
괜찮을까?
봉녕사 약사보전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이 계신
다. 약사여래부처님은 중생의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다. 과거 보살이었을 때 중생의 질병을 치
료하고 고통에서 구하겠다는 열두 가지 서원
을 세워 부처가 된 분이다. 한 생이 아니라 여
러 생을 준비해 의사가 되었으니 명의가 된 것
은 당연하리라. 그러니 몸의 병뿐만 아니라 마
음의 병까지 치료해준다. 큰 의사라는 뜻의
‘대의왕
大醫王
’으로 칭송받는 이유다. 대의왕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보다 더 위대하다
는 뜻이다. 이런 ‘슈퍼스타’의 처소가 약사보
전이다. 당연히 약사보전의 주인은 약사여래부
처님이다.
그런데 약사보전에는 주인만 모셔진 것이 아니
다. 약사여래후불탱화
藥師如來後佛幀畵
와 신중탱
神衆幀畵
, 현왕탱화
現王幀畵
가 있다. 그리고 칠
성탱화
七星幀畵
와 독성탱화
獨聖幀畵
, 산신탱화
山神
幀畵
도 함께 있다. 대가족이다. 전각 하나에 이
렇게 많은 탱화가 사이좋게 모셔져 있다니….
인사 드리러 가는 사람들은 즐겁다. 이리저리
옮겨 다닐 필요 없이 한자리에서 불보살님들을
친견할 수 있으니 발품을 팔지 않아도 좋고 시
간도 절약돼 경제적이다. 봉녕사는 이래저래 중
생들에 대한 배려가 많은 절이다.
약사여래후불탱화는 약사여래부처님의 후불탱
화로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가 동쪽의 유리광
세계
琉璃光世界
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불
화로 좌우에 일광
日光
보살과 월광
月光
보살을 포
함한 여러 보살들과 12지신 등이 그려진다. 약
사여래는 손에 중생을 치료할 약합
藥盒
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광보살은 보관이나 손에
해를, 월광보살은 달을 얹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봉녕사 약사여래후불탱화의 약사여래
는 약합을 들고 있지 않다. 일광보살과 월광보
살의 보관에서 해와 달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래서 왕왕 해석상의 오류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도상적 특징을 송광사 약사전의
약사여래후불탱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꼭
필요한 지물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이미 약
사여래의 후불탱화로 걸린 순간 이미 그 할 일
을 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조정육 .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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