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지 2014년 23호 - page 5

나라는 존재가 분명하게 있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이렇게 하는 놈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코가 냄새를 맡는 게 아니라 마음이 맡고, 입이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먹고,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듣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을 아무리 발 끄트머리부터 머리끝까지 찾고 더듬고 해봐도 잘
모릅니다. 분명히 있으면서도 형상도 없고 색깔도 없는 그 마음이라는 놈이 듣고 맛보고 향기를 맡고
별짓을 다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마음이라는 이 말도 사실 거짓말입니다. ‘참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 현상계에 가장
가까운 말로써 ‘마음’이란 표현을 한 것뿐이지 마음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이 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방법으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그러셨
습니다.
‘참나’를 마음이라고도 할 수 없고,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부처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마음을
“뭇 생명 가운데 하나다”라고도 할 수 없거든요. 불명
佛名
을 받고 ‘나는 아무개다’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데, 다른 사람하고 분간을 하기 위해서 이름을 짓는 것이지 그 이름이 내가 아니잖습니까? 나를
대표하는 가짜일 뿐이지요. 그래서 이 세 가지가 다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세 가지가 다 아닌 이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화두라고 그럽니다.
화두란 방편으로 마음을 찾아서 깨칠 수 있게끔 문제를 제시해 가지고 그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무아
의 경지에 들어가도록 하는 수행의 한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놓은 데를 몰라서 ‘아, 내가 그거를 어데 놨나? 문 위에 놨나,
마루 밑에 놨나?’ 하고 밤낮으로 생각하는데, 나중에는 그 찾으려는 마음까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
가 어느 날 우연히 ‘아차, 그걸 여기에 놨구나!’ 하고 생각지도 않게 그 놓은 자리가 알아지듯, 화두
라는 것도 그렇게 깨달아지는 겁니다.
「서장
書狀
」에도 나왔듯 ‘욕행천리
欲行千里
인댄, 일보위초
一步爲初
’라, 천 리 길을 가려고 하면 첫걸음이 시
작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불교라 하는 것은 그 길이 순환도로와 같습니다. 첫발을 잘 디디고 발심
만 잘하면 구경
究竟(가장 지극한 깨달음)
의 목적지인 우리의 길, 즉 성불이 가깝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만 하고 내버리지 말고 길을 가다가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참중 노릇이며 수행과
정인 것입니다. 여기저기 갈팡질팡하며 인생을 헤매지 말고 참선을 해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야 되고,
경전을 배워 부처님 말씀을 일러주고 전달을 해야겠다 하면, 연구를 해서 눈을 감고도 그 경전을 다
외울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포교사도 그렇고 뭐든지 전공을 안 하면 성공을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속마음으로 망상하지 말고 세 번만 따라해 보세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막 뒤섞여서 범벅을 하지 말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 차례차례 잊어버리지 말고 요걸 인자 오늘부터
덜 자고 망상도 덜 하면서 불성
佛性
의 인
이 되게끔 그렇게 해주길 바랍니다.
| 성도재일 법문 중에서 (2008.11.4)
향내음이 마치 아름다운 소리와 같다고 해서 ‘향성香聲’이라고 표현한다. 향내음을 맡는 것을 ‘문향聞香’, 즉 ‘향내음을 듣는다’라
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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