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지 2013년 10월 제 21호 - page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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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녕사의
역사와
문화
석조삼존불상조성시기
삼존불 협시상의 성격이 비슷한 강화여고 출토
금동삼존상을통해봉녕사석조삼존불상의조성시
기를 몽골의 고려 침략기 이후로 추정했다. 구체적
인 시기는 함안 대산리 석조 삼존불상
(보물 71호)
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삼존불상 역시 좌협
시 보살상이 육계가 없어 협시 보살상의 성격이 명
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환조로 조각된 고려시대 ‘석조 좌상+석조 입상’으로
구성된 삼존불의 구성은 고려시대 조각사에서 매우
드물다는점을통해함안삼존불상과봉녕사삼존불
상의조성시기를비슷하게볼수있었다.
봉녕사 석조 삼존불상의 조성시기를 좀더 구체
적으로추정할수있는것은본존불의대좌이다. 본
존불 대좌의 하대석은 폭이 좁고 높게 제작되었으
며복련의경사도가급한편이다. 중대석은평면팔
각이며낮고상대석은하대석보다넓으며연꽃잎이
서로떨어져있다. 영광불갑사각진국사자운탑의
기단부가 하대석이 높고 복련의 경사도가 급하며
낮은 중대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봉녕사 삼존상
본존불대좌의중대석및하대석과비슷하다.
봉녕사 석조 삼존불상의 구체적인 조성시기는
각진 국사 자운탑이 조성된 1355년에서 수원 창성
사 진각 국사 탑비가 만들어진 1382년 사이로 추
정할 수 있다.
석조삼존불상의미술사적의의
봉녕사 석조 삼존불상은 마모가 심하고 입체감
과 비례감이 줄어든 모습이어서 전문적인 장인이
조성하지 않은 민불
民佛
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
나 조성시기가 14세기 중기 이후인 고려 말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체적인 한국 조각사의 흐름에
서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
몽골 침략기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고려는
강화도를 개경과 같이 만들고자 새로운 사찰을 창
건하고, 금동불상을 개경에서 옮겨오거나 왕실 장
인들이 새로 조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석불이나 마
애불의 경우, 환경의 제약으로 조각기법을 전수받
은장인들의전통은거의단절된것으로보인다.
봉녕사 석조 삼존불상은 왕명으로 조성한 탑
비마저 전문 석장이 조성하지 못한 시대에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몽골 침략기와
원 지배기에 단절되고 쇠퇴했던 한국 조각사의 맥
을 잇는 석불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원 제
국의 침략과 간섭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인 14세기
중엽경에 단독 석조 불상도 아닌 석조 삼존불을
조성했다는 건 당시로서는 많은 역량과 관심을 집
중한 조불 사업이라 할 수 있다. 봉녕사 석조 삼존
불 조성에 전통을 잇는 전문 석장이 참여하지 않
았다 해도 나름대로 불상에 관한 지식이 있는 석
공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봉녕사 석조 삼존불상은 그동안 거
의 연구되지 않았던 고려 후기 석조 불교조각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몽골 침략기에 단절된 석조 미술
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
의가 있다고 하겠다.
봉녕사 불화
봉녕사 약사전에는 4점의 불화가 봉안되어 있
다. 이가운데신중탱화와현황탱화는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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